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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이론: 게슈탈트 심리치료-Fritz Perls의 인생(1)
  • 작성자 : 비움심리상담
  • 작성일 : 2017-08-11
  • 조회 : 4392

Fritz Perls의 인생

 

도입부

 

이번 장은 Perls의 삶에 대한 개관을 제공한다. 그의 인생 이야기에 관한 것이며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여러 운동들(movements), 사람들과 경험들 그리고 그가 Laura Perls와 Paul Goodman과 함께 공동으로 창안했던 치료적인 접근  게슈탈트 심리치료- 을 특히 집중해서 다룬다. 그래서 인생 이야기는 그의 인생 이야기에 영향을 준 경험들을 탐구하는 짧은 우회로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영향들에는 연극, 춤, 운동들(movements)과 사이코드라마; 정신분석에서의 다양한 혁신가뿐만 아니라 Freud와 정통 정신분석; Reich와 몸 치료; 게슈탈트 심리학, Goldstein의 유기체 이론, Wertheimer의 장 지향성과 Kurt Lewin의 장 이론; 실존주의, 현상학과 Buber; 전체주의, 특히 Smuts; 대인간 심리분석(예를 들어, Horney, Sullivan); 동양 종교들이 있다. 게다가, 수 많은 정치적인 격변이 Perls의 인생에 특별히 영향을 주었다: 제 1차 세계대전; 1930년대에 독일에서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의 발생; 네덜란드에 이어 남아프리카로 망명자로서 도피; 세계 제 2차 대전 동안 남아프리카에서 활동적으로 복무하는 동안 독일에 대한 충성에서 영국에 대한 충성으로 변화; 1946년에 남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이주 하면서 생긴 대륙과 문화에 있어서의 더 큰 변화. 마지막으로 다양한 중요한 사람들(특히 Laura Perls와Paul Goodman)이 있는데,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Perls의 인생에 긴밀하게 엮이었으며 게슈탈트 심리 치료를 공동으로 창안하는데 기여하였다.

 

따라서 1장은 2장과 3장에 각각 나오는 Perls의 이론적이고 치료적인 기여에 관한 논의, 4장의 기초를 형성하는 그의 치료작업에 대한 비판에 대한 평가, 5장의 심리치료와 상담 분야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영향의 탐구를 위한 맥락을 제공한다.

 

베를린에서의 어린 시절

 

Fritz Perls는 1893년 7월 8일에 베를린 외곽에 있는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Friedrich Saloman Perls라는 이름으로Amelia Rund와 Nathan Perls의 세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정은 힘들었고, 태어난 직후 그의 엄마가 젖을 주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곧 심하게 아팠다. Fritz의 아버지 Nathan은 자주 집을 떠나 여행하는 포도주 무역상이어서 자식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Nathan은 재치 있고, 잘 생기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Fritz가 태어날 즈음에 Amelia는 남편의 지배적인 방식에 환멸을 느껴 외도를 반복했다. 둘째 아이인 Grete는 아버지가 Grand Master(최고 수준의 체스 선수-옮긴이)로서 Freemasons Lodge를 지배한 것처럼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Perls, 1969c: 250) Nathan은 Fritz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경멸하는 것을 번갈아 하면서 특히 거칠고 폭언이 오가는 험악한 관계를 Fritz와 만들어갔다.

 

Fritz가 3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베를린의 좀 더 부유층이 사는 중심지역으로 이사했다. Nathan은 좀 더 큰 독일의 지역사회로 들어가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좁은 틀을 깨기를 원했다. 그는 반 종교적이었고 그의 관점을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유대인이 아닌 지역사회에 통합되기를 원했던 Nathan과 같은 유대인은 그 당시에 독일인 아리안인들에 의해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어느 쪽의 지역사회에도 속하지 못했고, 마치 Fritz가 그의 성인기에 했던 것처럼,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사람들에게 영원한 문이 열려있는 집(고향)을 찾는 것을 계속했다. 하지만 Fritz는 종교적인 신념이 완전히 없이 자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중요한 행사에는 유대교 예배에 계속 참석하는 동안 그는 히브리어 수업을 들었고 바르미츠바(bar mitzvah 유대교에서 13세가 된 소년의 성인식-옮긴이)를 치렀다. 10대가 되었을 쯤, Fritz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했고, 평생 평안 무신론자로 지냈다.

 

그의 어린 시절 동안 Fritz는 어머니와 좀 더 편안한 관계를 가졌었던 것 같다. Amelia는 자식들에게 큰 관심을 쏟아 부었고 Fritz의 뒤 꽁무니를 좇아 다니며 키워서, Fritz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지저분한 것을 치워줄 거라는 평생의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만년에 그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습관이 한심하다고 생각했고, 몇몇의 경우에는 그가 호의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서 아주 격렬하게 말다툼을 했다.(Posner, 1991) Amelia는 예술에 열정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연극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Fritz에게 물려주었고, Fritz는 이런 유산을 충심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엄마는 나에게 매우 야망이 있었고 유대인 엄마같은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양복장이였고 그녀의 배경을 고려해볼 때 예술에 대한 그녀의 관심  특히 연극에 대한 관심-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Perls, 1969c; 182)

 

Fritz가 태어났을 때, 가족의 큰 딸인 Else는 세 살이었다. 그녀는 약시(弱視)여서 엄마에게 붙어 있었다. Fritz는 Else에게 몹시 화가 나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지나 포로 수용소에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의 애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1년 반의 나이 차이가 난 둘째 딸인 Grete 누나와는 잘 지냈다. 나는 Grete누나와 친했다. 그녀는 말괄량이었고 고집이 센 곱슬머리의 무모한 사람(wildcat)이었다.(Perls, 1969c; 181) 그녀는 자라서도 Fritz와 연락을 계속했고 결국에는 Fritz를 따라 뉴욕에 갔으며, 그곳에서 10년 동안 그와 그의 가족들을 돌봐주었고 Fritz가 유명하게 되었을 때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기뻐했다.

 

어린 소년으로서 Fritz는 상당히 행복했었던 것 같고 초등학교에서는 반에서 1등을 했다. 하지만, 10대 이후에, Fritz는 부모님과의 관계도 학교와의 관계도 모두 악화되었다. 그가 나중에 기록하기를(1969c) 그의 부모님은 10살이 되었을 때 그를 나쁜 아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Else를 위해 남겨둔 금시계를 훔쳐서 그가 친구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어했던 기독교도 남자아이를 주려고 우표를 사는데 그것을 써버렸다.(pp. 249-51) 또 다른 경우에는, 그의 엄마가 그에게 몹시 화가 나서 그를 때리려고 카펫 터는 도구를 가지고서 그를 쫓아갔다. 그녀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 그는 엄마에게 유리를 던지고 그녀의 면전에서 문을 닫았다. 그는 제멋대로인 정말 제멋대로인 아이였다.(Grete Gutfreund in Gaines, 1979: 1) 아들에 대한 그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Amelia는 그의 아들의 못된 행동을 남편에게는 숨겼다. Nathan의 계속되는 불륜 그리고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지 않는 것과 함께 이런 일은 부부가 소원해지는 것과 Fritz와 아버지 사이의 갈수록 악화되는 관계에 기여했다.

 

Mommsen Gymnasium 중등학교 선생님들은 반 유대교의 규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고 Fritz에게 가장 모질게 대했다. Fritz는 학교 공부나 과제도 하지 않았고 무단 결석을 일삼았고 부모님께 알려드리는 자신의 생활 기록부를 중간에서 가로챘다. 결국에는 Fritz는 태만으로 인한 나쁜 성적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짧고 불미스러운 일이 있은 후에, 그와 그의 친구 Ferdinand Knopf는 또한 Mommsen Gymnaium에서 중퇴하고, 진보적인 Askanasische Gymnasium에 등록했는데, 그곳의 선생님들은 두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Fritz의 독립적인 방식, 총명함과 연극에 대한 관심을 확인해주었다. 청소년 중기쯤, 그는 베를린에 있는 Royal Theater에서 엑스트라 배역을 얻었다. 그가 말이 없는 역할만을 연기했음에도, 그는 전문적인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의 매력을 충분히 음미했다.

 

Fritz는 Deutsche Theater의 감독인 Max Reinhardt를 만나서 공부했다. Reinhardt는 도전의식을 북돋아주는 선생이었고 그의 학생들에게 사람들이 목소리 tone이나 제스쳐를 통해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자세히 관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Reinhardt의 가르침은 Fritz의 과정에 대한 관심과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자신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수단은 말하는 내용만큼 전체적인 메시지에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맨 처음 일깨워줬다. 이런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강조는 Perls에게 중요한 영향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몸 언어를 이해하는 데 천재성을 개발했고 만년에 청중들이 말하거나 앉거나 걷는 방식을 단지 관찰한 것만으로도 그들에 관한 개인적인 정보를 많이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Reinhardt와 함께, Perls는 연기에 대한 취향과 재능, 극적인 기법에 대한 숙달, 타이밍과 창의적인 긴장감 증진에 대한 재능을 발전시켰고, 그것들이 나중에 그의 치료 작업의 특징이 되었다. Perls(1969c)는 Reinhardt를 내가 만나 최초의 창의적인 천재(p.282)로서 말하면서 그에게 빚진 것을 인정했다.

 

Fritz는 엄마와 화해를 했고 학문적으로 만회를 해서 Askansasiche Gymnasium을 반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했던 아버지와는 소원하게 지냈고, 그를 ein Stuck Scheisse즉, X같은 사람(a piece of shit)이라고 자주 욕했다. Fritz가 그의 아버지를 당연히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Fritz Perls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놀랍게도 Nathan의 스타일과 비슷했다. Fritz는 자신의 아이들이 어릴 때 집을 너무 자주 떠나 있었고, 종종 애정을 보이지도 않았다. (Shepard, 1975) 넓은 의미에서 보면, 치료사로서 때로 거칠게 대면하는 스타일과 충격(불쾌감)을 주는 의도적인 언어사용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와 인격 형성기 동안에 만들어진 유산이었을 지도 모른다.

 

베를린에서의 의학 공부와 제 1차 세계 대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Perls는 베를린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은 그의 삶과 학업에 비교적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육군 신검에서 구부정한 자세와 가늘고 긴 심장과 천식 때문에 부적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6년까지 전투는 엄청나게 악화되었고 전례 없는 군인들의 사망 때문에 독일 육군에서 왕성한 병역 의무를 수행 하는데 요구되는 적합성의 기준이 급격히 느슨해졌다. Fritz Perls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Ferdinand Knopf는 입대하였고, Perls는 독가스 공격을 위해 훈련된 부대인 36 Pioneer Battalion의 담당의사가 되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Perls는 누추하고 불결한 참호에서 몇 개월을 보냈고, 상처를 입어 전공(용맹) 훈장을 수여(decorated for bravery) 받았다. 그는 치료 해야 할 너무 많은 부상자들이 있어서 담당의사로서 선택해야 했던 것들 때문에 종종 괴로워했다. 특별히 끔찍했던 한 경우가 있었는데, 독일군이 적군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한 직후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 독가스가 독일군 참호로 되돌아와 방독면이 망가졌거나 부족해서 많은 독일 군인들이 독가스에 질식되었다. 그런 비상사태에서 Perls는 단지 네 개의 산소탱크만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산소를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산소 마스크를 임의로 벗겨내야만 했다. 나는 또 다른 군인들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기 위해서 플라스크를 억지로 떼어내야만 했다. 땀으로 범벅인 내 얼굴에서 내 마스크를 떼어내고 싶은 유혹이 몇 번이고 들었다.(Perls, 1969c: 154) 1917년 그가 군의관 중위로 진급했을 때, 그의 치료 서비스의 상황은 향상되었다. 그러나, 전쟁 끝 무렵에 그의 부대는 하루에 20시간씩 행진을 강요당하여 귀향할 것을 명령 받았다. 이런 새로운 스트레스 상황에서 Perls는 평생 습관이 된 담배 피우기를 시작했다.

 

전쟁 동안의 고통은 Perls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Ferdinand Knopf는 전사했고 그는 대량 학살을 목격했으며 전공훈장[무공훈장]을 수여 받았고 그의 많은 상관 장교들의 모욕적이고 편견 어린 태도를 창피해했다. 그가 목격했던 파괴가 아마도 몇 명의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는 확신은 그의 남은 평생 동안 그의 정치적인 견해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 이후에 그는 좌익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그 이후 반체제 운동과 관련을 맺었다.

 

1918년 그는 중단된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베를린과 프라이버그(Freiburg)에 돌아왔고 1920년 4월 3일에 의학박사로서의 자격을 갖췄다.

 

주로 베를린에서 신경정신과의사로서 치료(1921~1926)

 

자격을 취득한 후, Perls는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개업을 해서 다양한 심리적이고 신경증적인 질환에 대한 의료적인 치료를 처방했다.

 

사회적으로는, Perls는 베를린 Bohemian 커뮤니티에 합류해서 예술가, 시인, 건축가, 작가, 배우와 Bauhaus(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하였다.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려는 것이었다.-출처: 네이버 백과 사전) 그룹을 포함해서 그 당시의 좌익 지식인들과 교제했다. 이런 사람들 중에 Perls는 철학자인 Sigmund Friedlander(1918)에 만났는데, 그는 Perls에게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를 정의하며(define) 양극을 아우르는 중간에 정지하는 지점  창의적인 무관심의 지점-이 있다는 아이디어를 소개해줬다. Friedlander의 개념들은 Perls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고, Perls는 그의 첫 번째 책(1947/1969a)에서 그 개념들을 광범위하게 이용하였다.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Perls는 혁신적인 독일인 표현주의자 댄서이며 대형 합창 공연의 안무가인 Mary Wigman의 제자인 Palucca라는 혁신적인 댄서와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Palucca는 자발적인 자기 표현과 창의성의 수단으로서의 댄스와 몸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도록 영감을 주었다.

 

1923년에 Perls는 뉴욕에 갔고 거기에서 관절치료 전문 병원(Hospital for Joint Disease)에 있는 신경학 부서에서 일하며 동시에 미국에서 의사로서의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향수병과 서툰 영어 때문에, 그는 Bauhaus 친구들과의 아디어를 창의적으로 교류하는 것을 몹시 그리워했다.

 

단지 6개월이 지난 후인, 1924년 4월에,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다시 신경정신과의사로서 개업을 시작했다. 그는 31세가 되었을 때까지 어머니의 집에서 계속 살았다. Shepard(1975)에 따르면, 그는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다. 개인적인 도움을 구하기 위해, Perls는 정신분석을 해보기로 결정하고 혁신적인 정신분석가인 Karen Horney를 선택했는데, 그녀는 자신만의 정신분석 접근을 확립했다. (1937; 1739) Perls가 베를린으로부터 멀리 이사를 가서, Horney와 함께 하는 Perls의 정신분석은 본격적인 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여 년에 걸쳐서 조언과 감독(지도)를 위해 그녀에게 종종 의존했다. 나중에 그가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그는 그녀와 친밀한 직업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그녀가 최초로 만난 정신분석가였고 그래서 그녀는 그의 직업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본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통 정신분석에 대한 의문과 혁신에 의해서도 그녀에게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 (Cavaleri, 1992) 그때, Perls는 정신분석과의 첫 번째 만남에 대해서 상당히 열정적이었는데, 자기 자신이 직접 정신분석가로서 훈련을 시작했다.

 

 Frankfurt, 1926 ~ 1927

 

1926 년에 Perls는 Horney의 제자인 Clara Happel과 함께 정신분석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매우 지적인 환경이었다. 즉, 게슈탈트 심리치료사인 Gelb와 Goldstein이 거기에서 살면서 치료하고 있었고 실존주의자인 Martin Buber와 Paul Tillich도 있었다. Perls는 게슈탈트 심리학에 관한 강의에 참석했지만 개인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게슈탈트 심리학과 실존주의 아이디어에 대한 이해를 젊은 심리학 대학원생인 Lore Posner의 우정을 통해서 심화시켰다. 그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었고 Laura Perls로 알려졌다. (p. 11을 보세요)

 

게슈탈트 심리학의 영향

 

프랑크푸르트에서 Perls는 게슈탈트 심리학자인 Wertheimer(1938; 1944), Koffka(1935) 그리고Kohler(1970)의 발견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지각에 대한 주요한 게슈탈트 원리와 Zeigarnik(1927)와 Ovsiankina(1928)의 작업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독일어인 gestalt는 전체나 완성된 패턴, 형태나 배열을 의미한다. 게슈탈트나 전체는 고려되고 있는 전체 물건이나 사람, 그것의 맥락과 둘 사이의 관계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어두운 표면 위에 있는 하나의 눈송이는 눈보라가 치는 동안 내리는 다른 많은 눈송이들의 맥락에 있는 똑같은 눈송이와는 전혀 다르게 지각된다. 그 눈송이의 의미와 중요성은 그것이 보여지는 맥락에 의존하며 그 맥락과는 분리될 수 없다. 그 눈송이의 게슈탈트와 전체는 그 자체와 환경과의 관계를 구성한다. 그것의 의미는 그의 배경과의 관계로부터 나온다. 지각에 관한 게슈탈트 원리에 대한 더 깊은 논의는 38~39쪽과 40~47쪽을 보라.

 

Perls가 나중에 게슈탈트 치료에 통합한 게슈탈트 심리학의 원리들은 다음과 같은 개념을 포함한다. 사람은 그들이 지각한 것의 전체를 그들에게 현재 재미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을 것들에 체계화하면서 자신의 지각적인 경험을 구조화한다. 그들은 현재 재미있는 것들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각적인 전체(게슈탈트나 figures)로서 간주한다. 사람들은 해결된 경험보다 미해결된 경험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Sigarnik, 1927) 그들은 미해결 과제를 다시 시작해서 끝마치고자 하는 자연적인 경향이 있으며(Ovsiankina, 1928) 완성되지 않은 정보와 상황으로부터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이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과 게슈탈트 심리치료가 이름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 둘은 구별이 뚜렷한 지식분야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학문적이고 실험적이다. 그것은 지각을 기술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는 치료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연구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몇몇은 게슈탈트 치료 체계가 게슈탈트 심리학과 많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Yountef(1982)는 게슈탈트 치료의 기본 방법론이 철학적으로 게슈탈트 심리학으로부터 나왔다고 입증했으며Wheeler(1991)는 게슈탈트 치료에 있어서 게슈탈트 심리학적인 배경을 깊이 분석하였다.

 

Perls는 Wertheirmer의 장 지향성(field orientation)과 1920년대 초기의 게슈탈트 심리학자인 Koffka와 Kohler와 교제를 했던 사회심리학자인 Kurt Lewin(1935; 1952)의 장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Fritz가 Lewin의 출판된 글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는 Lewin을 분명하게 언급했고(1952), 그의 몇몇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에 포함시켰다.(47쪽을 보라)

 

Frankfurt에있는 동안 Perls는 뇌 손상 군인을 치료하는 기관(Institute for Brain-Damaged Soldiers)에서 Kurt Goldstein의 조수로 일했다. Kurt Goldstein은 게슈탈트 심리학의 비교적 학문적인 연구와 발견들을 확장하는 것과 게슈탈트 지각 원리들을 살아있는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데 관심이 있었다. 두뇌 손상으로 고통을 당하는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Goldstein은 인간의 한 부분의 손상은 전체 유기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Goldstein(1939)은 나중에 인간을 전체적인 유기체로서 논의하며 가장 중요한 인간 욕구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Goldstein의 출판된 유기체 이론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그와의 직업적인 만남은 후에 모든 다른 부분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 체계로서의 인간의 개념을 발달시키는데 있어서 그리고 자기 실현의 관점에 있어서 Perls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Perls, 1979)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영향

 

Laura Perls는 자신의 실존주의적인 아이디와 현상학적인 방법들에 대한 지식을 Fritz와 공유했다라고 시사했다. 그녀는 현상학자인 Husserl(1931:68)을 연구했다. 그녀가 Frankfurt에 살았을 때, Fritz와는 달리 Laura는 실존주의 이론가인Buber를 개인적으로 만났고 몇 년 동안 Tillich와 함께 일했다.(Laura Perls in Rosenblatt, 1991) 이런 사실이 게슈탈트 치료의 미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초기에는 Fritz가 게슈탈트 치료에 필수적이었던 실존주의 개념을 배우게 되는 주요 통로가 Laura였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Perls는 실존적인 소외, 다른 사람과 함께 존재하기, 제한된 인간 한계 내에서의 자유, 진정성(authenticity),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이라는 실존주의의 기본 주제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각 개인은 궁극적으로 혼자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친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 각각은 이 삶에 홀로 왔다가 홀로 떠나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갈등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계속 존재하고 싶은 바램 사이의 긴장이다.

 

Perls(1969b; 1976)는 특히 자유, 책임, 진정성(authenticity)과 불안의 실존주의 개념을 강조했다. 실존주의 의미에서,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외부적인 구조나 강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의 책임감에 대한 개념과 우리가 순간 순간 선택을 하는 자유의 개념은 무서운 결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나 기관에 의무가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또는 우리 운명에 대해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우리 자유와 개인적인 책임의 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개인적인 자유라는 아이디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개념이다. 즉, 진정성있게 산다는 것은 진실성(integrity)을 가지고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 자기 기만이나 게임 하는 것처럼 사는 것(game-playing)없이 우리는 자유롭고 책임이 있으며 동시에 죽을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워졌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진정성은 계속되는 불안정, 실존적인 불안 또는 두려움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불안은 완화되거나 억압되어야 하는 증상이 아니라 실존을 진정으로 살아내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 맥락에서 불안에 관한 Perls의 관점에 대한 논의는 80페이지를 보라.)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고 더군다나 자신의 실존을 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내도록 운명 지워졌다. Perls는 자신의 게슈탈트 치료에 철학적인 기초로서 채택한 현상학적인 실존주의는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만의 세상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즉, 유일하게 명백한 진리는 없다. 그래서 각 사람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그 사람에게는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경험의 객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자료의 중요성도 강조하며, 사물과 경험 그 자체의 실존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기술된 것의 중요성에 관한 이전의 가정을 괄호 안에 제시하면서 지각되는 것을 기술한다. (46, 92, 113쪽을 보라)

 

Vienna & Berlin (1927~1933)

 

프로이드와 정신분석의 영향

 

1927년에 Fritz Perls의 모아놓은 예금은 바닥이 나서 Clara Happel은 그의 정신분석이 이제 종결되었다고 갑작스럽게 단언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supervision하에 내담자를 받아 정신분석가로서 그의 훈련을 계속할 것을 권고하였다. Perls는 자신에 관한 정신분석이 종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여전히 자기를 알 수 있는 좀 더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측면에서는 Happel의 충고를 따랐다. 즉, 그는 정신분석 훈련의 중심지인 Vienna로 이사를 해서 거기에서 약 1 년 동안 살았다. 그는 Paul Federn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가인 Helene Deutsch와Edward Hitschmann으로부터 supervision을 받아 내담자를 보기 시작했다.

 

1928년에 비엔나에서 정신분석가로서 그의 마지막 훈련을 끝마친 후, Perls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만의 정신분석 치료실을 개업했다. 1928년부터 1933년까지 Perls는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면허증을 가진 치료사로서 독일, 주로 베를린에서 일했다.

 

Perls에게 끼친 프로이드의 영향은 상당했다. 프로이드 이론과 정통 정신분석은 Perls가 창안하려 했던 정신분석의 새로운 체계에 필수적인 배경이었다. 프로이드의 아이디어는 매우 귀중하지만 정신분석의 철학과 방법의 많은 부분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라는 것이 Perls의 믿음이었다. (1948; 1976) 비록 Perls가 결국에는 프로이드 아이디어의 많은 부분을 비판하고, 수정하고, 덧붙이고, 거부했을 지라도, 그는 또한 프로이드의 기여의 많은 부분을 그가 창안한 게슈탈트 치료의 토대로서 통합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신경증과 정신병적인 행위에 근원적인 의미가 있으며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어른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프로이드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항상성(homeostatic balance)에 대한 그의 관점은 프로이드의 항상성(constancy) 원리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가 꿈을 다르게 치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꿈이 매우 중요하다는 프로이드의 평가에는 동의했다. 

물론 Perls는 많은 혁신적인 정신분석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또한 정신분석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정통 정신분석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는 Ferenczi의 능동 기법(active technique)과 상호관계에 대한 강조, 융의 창의적인 상상, 그리고 아들러의 사회적 체계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개인에 관한 전체적인 관점을 아마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Perls, 1948) Isadore From은 Perls가 투사로서의 꿈에 대한 아이디어와 Otto Rank로부터 지금-여기의 개념을 소화했다라고 제안했다.(1991) Perls는 유럽에서 나중에 미국에서도 Horney의 정신분석에서의 혁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Perls, 1948; 1978a; Cavaleri, 1992) 개인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에 대한 중요성, 아동발달과 치료적인 관계에서의 대인간 요소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전체론적인 철학과 유기체와 환경이 만들어내는 상호간의 영향에 대한 탐구에 대해 그녀가 강조했던 것은 Perls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나중에 그는 이런 개념들을 게슈탈트 치료에 통합시켰다. (Reich가 Perls에게 끼친 영향은 12쪽에, Sullivan의 영향은 17쪽에 기술되어 있다.) 

  Perls는(Horney와 함께한 정신분석- 너무 짧아서 종종 무시됨-, Happel, Harnik과 Reich와 함께 한 정신분석) 총 세 네 번의 정신분석을 경험하였으며 또한 Horney, Deutsch, Hitschmann, Fenichel과 Landauer를 포함해 다양한 정신분석가들과 함께 슈퍼비젼을 받았다. Perls의 초기 저술(1947/1969; Perls, Hefferline and Goodman, 1951/1973)은 독자가 정신분석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이것은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의 어떤 부분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Perls는 1928년에 베를린에서 Eugen J. Harnik와 함께 두 번째 정신분석을 했다. 이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Harnik는 비참여적이고(무심한, detached) 수동적인 분석의 극단적인 형태를 믿었다. Perls가 Harnik와 함께 치료했던 1년 반 동안, Harnik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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