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no의 영향
1950년대에 Perls는 사이코드라마를 잘 알게 되었고, 사이코드라마는 그가 뉴욕에서 자주 갔던 지식인과 급진적인 사람들 그룹(circle)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Perls는 1958년 사이코드라마의 창시자인 Moreno를 적어도 한번 어떤 행사에서 만났다. Moreno(1934; 1964)는 매우 혁신적이었고 ‘그룹 치료’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1920년대 그 이른 시기에 즉흥성(spontaneity)과 지금-여기에 대한 강조를 시작했다라고 말해진다. 그는 1925년 미국에 사이코드라마를 소개했다. 사이코드라마는 우리 각자가 우리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맡고 있는 역할-어린이, 부모, 친구, 선생님, 연인, 사장 등-을 강조한다. 개인은 그의 인생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련하여 고정되고 또한 고정되지 않은 역할을 맡거나 서로와 갈등 속에 있는 그가 맡은 다른 역할을 발견할 수도 있다. Moreno는 개인이 지금-현재, 통제된 치료 장면에서 이러한 역할의 갈등상황을 다시 만들어내도록 허용하는 치료적인 접근을 고안했다. 내담자는 ‘주인공(protagonist)’이 되어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며, 한편 그룹의 다른 회원들이 다른 역할을 맡아 연기한다. 때때로 주인공은 그룹의 다른 회원들과 역할을 바꾸어 하며 그는 문제 상황을 충분히 탐구한다.
Perls는 1960년대에 시범을 보여 주려고 했던 적극적인 치료 접근에서 사이코드라마의 일부 측면들을 채택했으며 그는 그의 후기 작업에 Moreno의 영향을 인정했다.(1976) 교류 분석(Transactional Analysis)의 창시자인 Eric Berne는 Perls가Moreno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Perls 박사는 박식한 사람이다…. 구체적인 기법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그는 다른 “적극적인(active)” 심리치료사인 “Moreno”식 문제(the Moreno problem)를 함께 공유한다. : 거의 모두 알려진 “적극적인” 기법은 사이코드라마에서 Dr J.R. Moreno에 의해서 최초로 시도되었으며 그래서 이 점에서 있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Berne, 1970:163-4) 사실 Perls는 사이코드라마에 상당히 많은 독창적인 수정을 가했다.(see p. 103)
게슈탈트 치료: 인간 성격 안에 있는 흥미(Excitement)와 성장
Perls는 Ralph Hefferline과 Paul Goodman에게 그가 계획하고 있었던 책을 공동으로 집필할 것을 요청했다. Perls는 책에 대한 약간의 초기 원고를 제공했다.(Isadore From in Wysong and Rosenfeld, 1982) 그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그것을 좀 더 발전시킬 작정이었다. 사실 Hefferline은 그의 콜럼비아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실제적인 연습을 시도했고 책의 전반부에 많은 것을 덧붙였다. 한편 Paul Goodman은 책의 후반부 작업을 위해 Perls와 공동 작업을 했고 아마도 글의 많은 부분에 대한 주된 작가였을 것이다. ‘게슈탈트 치료에 관한 Paul Goodman의 저술에서, 폭넓은 개념으로 복원된 Perls의 영감을 발견한다.’(Miller, 1989:21) 이 책에 대한 Perls의 기여의 정확한 본질과 정도는 현재도 논란이 많으며 앞으로도 항상 논란이 많을 것이다. Gestalt Therapy에서 발전된 많은 아이디어의 씨앗은 Ego, Hunger and Aggression(Perls, 1947/1969a)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Goodman과 공동으로 작업하기 전인 Perls가 1946-1947년과 194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Gestalt Therapy는 Perls, Hefferline과 Goodman의 작품으로서 언급된다. 이론적인 부분은 Goodman과 Perls의 작업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최근 추세에도 불구하고(Wheeler, 1991), 우리는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는 데 있어 확립된 수단들을 따라가면서(follow) Perls 외(et al)라고 흔하게 줄여서 쓰기 보다는 우리 본문 전체를 통하여 세 명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Goodman과 Hefferline의 중요한 기여도에 경의를 표했다.
이것은 게슈탈트 치료의 기초 문서이며 새로운 치료 학파를 시작하였다. 새로운 접근의 이름에 관해 약간의 의견의 불일치가 있은 후, Fritz Perls는 게슈탈트 치료라는 이름으로 결정했다. Laura는 이 선택을 반대했으며 나중에 게슈탈트 치료와 게슈탈트 심리학이 모순된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반대하였다.(예를 들어 Sherrill, 1974; Henle, 1978) 하지만Yontef(1982)는 게슈탈트 치료가 역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철학적으로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Gestalt Therapy는 두 개의 책으로 나누어진다. Hefferline과 Perls가 쓴 Book One은 현재 기능(present functioning)에 대해 알아차림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한 실제적인 연습에 관한 것이다. Book Two(아마도 Perls가 시작하여 초안을 잡았고 Perls와 Goodman이 공동 작업을 했다라고 널리 인정받는 책)는 게슈탈트 치료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이다. 원래 ‘책들’이 바뀐 순서로 나오려고 했지만 출판업자가 직접 해보는 연습 부분이 좀 더 인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실제 연습 부분을 Book One으로 할 것을 권유했다. Book Two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Part One은 ‘성장의 구조(The Structure of Growth)’라고 불려지는 장으로 시작하는데 책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개요를 제공하며 독자에게 귀중한 예비교육의 내용이다. 처음 읽는 독자는 이 장의 끝에서부터 바로 Part Three의 시작으로 훌쩍 뛰어넘어가기를 바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책의 Chapter 2에서 기술한 것처럼 그 부분이 게슈탈트 치료의 가장 잘 알려진 이론적인 측면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Perls는 1969년에 그 책의 재판을 위해 새로운 작가 메모(Author’s Note)를 썼고 Gestalt Journal은 현재Isadore From과 Michael Miller가 서론 부분을 쓴 새로운 판(Perls, Hefferline and Goodman, 1951/1993)을 출판 중이며, 두 ‘책들’의 순서는 원래 계획된 순서에 따를 것이다.
Gestalt Therapy의 출판 직후에, Fritz와 Perls는 뉴욕 게슈탈트 치료 연구소(Gestalt Institute of New York)를 설립했다. 그 사이 혁신적인 치료 접근에 대한 소식이 뉴욕 밖으로 퍼지고 있었고 Perls는 발표자로 초대를 받아 그의 아이디어를 서로 나누게 되었다. 그는 Cleveland, Detroit, Toronto와 Miami에 정기적으로 출장을 가서 게슈탈트 치료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와 보통 사람들을 위한 소 그룹을 운영했다. 그리고 1954년에 Perls, Laura, Paul Goodman과 Isadore From은Cleveland 게슈탈트 치료연구소(Gestalt Institute of Cleveland)가 설립되는 것을 지원했다. Fritz Perls는 Cleveland를 계속해서 방문했고 Cleveland group에 가끔이지만 훌륭한 객원 치료사로서 작업하면서 영향력이 큰 모델을 제공했다.(Polster, 1992) 하지만 그의 친구와 동료인 Isadore From은 Cleveland에 있는 게슈탈트 치료의 초기 발달에 좀 더 광범위하고 일관된 영향을 주었는데, 그가 7일 동안은 거기에 정기적으로 갔고, 처음 5년 동안은 한 달에 두 번 그 다음 5년 동안은 한 달에 한번 갔다. (From in Wyson and Rosenfeld, 1982) From은 Cleveland의 회원을 그룹치료와 개인치료로 만났고 또한 이론 공부를 위한 그룹을 지도했는데, 거기에서 참가자들은 Gestalt Therapy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토론을 상세히 하였다.
1952년과 1956년 사이에 뉴욕에서는, 한쪽에서는 Fritz와 다른 한쪽에서는 Paul Goodman과 Laura Perls사이에 증가하는 경쟁관계가 있었다. Fritz는 그들이 그를 비판하고 깍아내렸다고 느꼈고, 한편 Laura와 Paul은 Fritz가 비판에 너무 과잉 반응을 하며 지적인 엄격함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1956년에 Perls는 심장질환을 진단받았다. 아프기도 하고 뉴욕의 상황에 환멸을 느껴서, 그는 Laura를 떠나 좀 더 온화한 겨울을 찾아 Miami로 이사를 갔다. 그는 이미 63세였다. Fritz와 Laura는 긴 기간 동안 다시는 함께 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진짜 그녀를 떠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집을 떠나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결코 이혼하지 않았고 Fritz는 가끔 뉴욕에 있는 Laura를 계속 방문했다. 그들의 며느리인 Rae Perls는 서로에 관해 불평하면서 어떻게 각자가 돌아가면서 그녀를 방문했는지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Miami, Florida
마이애미에서, 펄스는 후에 자신의 인생에 가장 특별한 여성이라고 부른, Marty Fromm을 만났다. Shepard(1975)는 그들을, 상당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2세, 펄스는 64세 였음) 상대방의 극단적이고 광범위하며 모순되는 개성을 서로 비추어 주는 매우 비슷한 두 사람간의 강한 끌림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교적으로 한 번 만난 후 Marty는 펄스와 함께 개인 상담을 시작하였다. 그녀가 그에게 치료를 계속 받은 서너 해 동안 그들은 연인이며 친구 관계가 되었고 그 관계를 유지하였다. 펄스는 무정부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질문을 하면서 통용되는 관습- 심지어 심리치료사와 내담자의 성적 접촉에 대한 금지조차도 - 에 저항하였다. Marty Fromm이 종종 그들의 성적 관계를 그녀의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정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펄스의 치료사와 내담자 간의 성적 접촉에 대한 태도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이라고 믿으며, 펄스의 이러한 태도는 게슈탈트 심리치료사들에게 내담자의 안전을 보호하고 치료사에 의한 내담자의 성적 착취를 금지하는 구체적인 윤리 강령들이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는 최근의 게슈탈트 현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1958년에 펄스는 Columbus State Hospital에서 정신 의학 수련의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잠시 오하이오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 펄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Marty Fromm을 그리워하였기 때문에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의 발전하고 자유롭도록 제공하였던 펄스의 치료적 지지는 점차 그의 개인적인 곤궁 및 성적 질투와 직접적인 갈등을 빚게 되었다. 동시에 Marty Fromm은 그가 많은 양의 약물, 특히 LSD(환각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점점 더 편집증적이 되어간다고 언급하였다. 펄스의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두 번이나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처음은 치질수술(haemorrhoidectomy)때문이었으며, 두 번째는 전립선절제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Marty Fromm과 보낸 시기 동안, 펄스는 저술활동을 계속하였으며, Marty Fromm은 최근에 Gestalt Journal 편집장에게 상당한 양의 출판되지 않은 원고를 보냈다.(Joe Wysong, 1992)
멘도시노 (Mendocino), 샌 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세계 일주
1959년 서부에 있는 멘도시노 주 병원의 심리학장인 Wilson Van Dusan이 펄스를 자문으로 초청하였다. 여기에서 펄스는 많은 전문적인 사회 복지사들, 정신분석가들 그리고 정신과의사 그룹들과 함께 일하였다. 그들은 펄스가 사람을 관찰하고 표면적인 버릇, 표정, 행동의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에 감탄하였다. 한번은 펄스가 Van Dusan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말하지 않도록 지시받은 후, 펄스는 사람들의 각 참가자들의 몸자세, 자기표현, 그리고 얼굴 표정에서 그가 본 것들을 관찰하면서 방을 돌아다녔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펄스의 묘사는 참가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할 정도까지 각 사람의 삶과 성격을 반영하였다. 멘도시노에서 두 번의 자문을 하는 기간 동안 펄스는 샌 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치료를 하였다.
1960년 후반에, 펄스는 불안해져 갔고 친구이자 이전에는 학생이었던, 게슈탈트 치료 발전에 독자적인 영향을 가지게 되는 Jim Simkin과 일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Simkin, 1974) 그들은 곧 두 개의 훈련 그룹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펄스는 치료소를 성장시켰으며 그와 Simkin이 고속도로 노선(highway routes)이라고 부른 것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 중에 San Bernardino Freeway와 Santa Ana Freeway를 따라가면서 주 중 여행을 시작했는데, 그 도중에 한 두 개의 병원에서 그룹 치료를 운영하고 개인 치료를 운영하면서 여행을 했다.
1962년에 펄스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작업은 시들해졌다. 다시 환멸을 느꼈고 그의 삶에서 모종의 방향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펄스는 동양과 중동 그리고 유럽을 방문하는 세계 여행을 시작하였다. 펄스에게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일본의 교토와 이스라엘의 Elath(이스라엘 남부 도시 : 역주) 그리고 Ein Hod (이스라엘 북부 도시 : 역주)였다. 쿄토에서 펄스는 Zen Buddhism(선불교)를 기쁨과 비판이 뒤섞인 마음으로 공부했다. 그는 텔아비브(이스라엘의 수도 : 역주) 근처의 예술가들의 공동체인 Ein Hod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두 달을 보냈다.
펄스는 1963년에 기분이 전환되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시기에 그는 심리학자 Gene Sagan으로부터 Big Sur에 있는 Esalen Institute에서 열리는 인본주의적, 실존적, 육체적 힐링의 지도자들을 위한 컨퍼런스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1964년 여름에 펄스는 Esalen에 있는 게슈탈트 치료에서 첫 번째 거주형 게슈탈트 치료 훈련 코스를 운영하였다. 그때부터 계속 펄스는 에살렌에 열의를 보였고 그곳에서 어떻게 자신의 진정한 고향을 찾았는지에 대해서 대해 흥분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Esalen 과녁이 Fritz Perls라는 화살과 함께 과녁의 한복판을 명중 시켰다.‘(자신의 진정한 고향을 찾은 것 같은 흥분된 느낌을 활이 과녁의 정 중앙(bull’s eye)을 명중한 것에 비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최영주)
캘리포니아 Big Sur에 있는 Esalen Institute
펄스는 1964년에 에살렌에 살기 위해 이주하였고 1969년에 치료 연구소를 떠날 때까지 게슈탈트 거주형 훈련자로서 거기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펄스는 드디어 게슈탈트 심리치료를 수 천명 의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으며, 그가 바라마지 않던 개인적 존경과 애정 그리고 감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에살렌은 미국 서부 해안 절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가는 길의 3분의 1 지점이다. 에살렌에서는 태평양의 가장 수려한 장관을 볼 수 있으며 천연 유황 온천이 있어서 온천욕을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펄스는 에살렌의 위치를 사랑하였으며, 1년 안에 바다를 바라보는, 특별하게 설계된 반 원 모양의 집을 거기에 지었다.
펄스가 에살렌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심장 질환은 악화되었었고 그는 고통스러워 자주 성질 나쁘게 굴고 곧잘 화를 냈다. 그 당시 Ida Rolf(1977)는 습관적이고 만성적인 긴장을 풀어주도록 디자인 된 Reich의 신체 갑옷 이론에서 영감을 받은 - 구조적 통합 또는 롤프식 마사지 (역주 ; 근육을 깊숙이 마사지하는 물리 요법) - 그녀의 심오한 근육 마사지 체계를 발전시켰다. 한 주가 끝날 무렵, 그는 고통이 없어졌다. 완전히 기쁨에 넘쳐, 그는 그녀에 대한 감사를 그의 자서전에 표현하였다. (1969) 그는 에살렌의 좋은 기후와 더불어 Ida Rolf가 그에게 인생의 마지막 6년을 선사했다고 믿었다.
1960년대 중반에 에살렌 연구소는 매우 성공적이 되었다. 프로그램은 새로운 성장과 인간 잠재 력 회복 운동의 모든 국면을 포함하여 다채로워졌다. 주거형 훈련가들에는 펄스와 마사지사인 Bunard Gunther, 참 만남 집단(encounter group) 운동의 주 창시자이자 그룹 작업, 무아경, 정직, 참 만남 그리고 단순함을 주제로 한 여러 책의 저자인 William Schutz가 포함되었다. 에살렌은 자신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를 바라고, 그들 자신을 인지적으로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더 잘 이해하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에살렌에 기초를 둔 허구적인 장소에 관한 영화(Bob and Carol and Ted and Alice)와 베스트 셀러 책인 Joy(Schutz, 1967)을 통해 그리고 펄스가 거기에서 직접 만든 비디오들과 영화들, 책들을 통해 그곳에 한 번도 방문해 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대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64년과 1969년 사이에, 펄스는 많은 미래의 치료사들, 훈련가들, 예술가들, 그리고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그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들을 통해 펄스의 철학, 아이디어, 그리고 기법들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방식으로 펄스가 영향을 준 많은 사람들 중에는 Robert Hall, Claudio Naranjo, Abe Levitsky, Janet Lederman, Anna Halprin, John Stevens, Barry Stevens, Joe Wysong, Stanley Keleman, Janie Rhyne, George와 Judith Brown, Gabrielle Roth, Edward Rosenfield, 그리고 Sam Keen(Gaines, 1979)이 있다. William Schutz, Virginia Satir 그리고 Rollo May를 포함하는 많은 에살렌 훈련가들은 펄스의 워크샵에 방문하였거나 그의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역시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인간 잠재 능력 회복 운동의 선구자인, 아브라함 매슬로는 펄스가 관여한 적어도 한 번의 이벤트에 참가하였거나 혹은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펄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Perls는 Maslow의 심각한 기여에 대해서 싫증을 내며 엎드려 주변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The story goes that Perls got bored with Maslow’s serious contribution and started crawling around on his belly.: Perls가 Maslow의 공로에 대해서 크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최영주) Maslow는 Perls를 미친 사람이라고 일축했다.
Perls는 Esalen과 그의 빈번한 여행에서 점점 더 큰 그룹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커스들(circuses)”이라고 부르는 그만의 새로운 스타일의 이벤트를 도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백 명 혹은 그 이상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무대 앞에서 게슈탈트 치료 시연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큰 이벤트 덕분에 그는 이제 새로운 hot seat technique (뜨거운 의자 기법) 을 발전시켰다. 그는 그와 함께 작업하기를 희망하는 청중들을 초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빈 옆자리에 앉게 하여 함께 작업하였다. 이것은 드라마틱한 시연 방법이었는데, 그의 독특한 직감과 예리한 관찰력을 드러내주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Perls로 하여금 무대적, 연극적인 방법들을 평생에 걸쳐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 “ 그가 누군가와 작업을 하는 모든 시간은 마치 퍼포먼스와 같았다... Fritz는 연극 디렉터가 되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는 그것을 너무 너무 좋아했다.” (Anna Halprin in Gaines, 1979: 200). 시연과 시연 사이에, 그는 그가 작업했던 것의 배경에 있는 이론이나 생각에 대해 자신의 간단한 의견을 덧붙였다.
1968년, Perls를 위한 75세 생일 축전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Miyako 호텔에서 마련되었다. 최소한 2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저녁 파티에 모였고, 축사가 있었다. 축전에서 Perls의 인기가 만들어지자, 그는 그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그는 여전히 - 그리고 종종 - 무례하고 경솔하며, 고의로 사교적으로는 엉뚱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활기참과 직원들과 Esalen 방문객들에게 보인 애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게슈탈트 치료 축어적 보고(Verbatim)
John Stevens는 Perls의 시연 워크샵들과 이론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을 글로 편집하였다. 그리고 1969년 7월, 게슈탈트 치료의 축어적 보고 Gestalt Therapy Verbatim 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Perls, 1969b). 출판된 책은 생생하고 읽기가 쉬우나 기록의 이론적인 문맥의 일관된 발전은 없다. 책에 있는 워크샵들은 주로 꿈에 관한 작업과 꿈을 가지고 작업한 Perls의 방법들이 포함되어 있다.(see p. 12).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이 축어적 보고가 완전한 치료 therapy 세션의 글이라고 주장한다. Perls 스스로는 치료와 세미나에서 있는 큰 시연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 지으려고 애썼고 (1969b: 74), 이 시연들이 치료가 아니었다 는 것을 강조했다.
이 책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전체적으로 명료하고 기억하기 쉬운 구절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불안은 지금과 나중 사이의 간격(gap)이다” (gap : 틈, 간격, 차이, 공백, 거리 -번역자)(p. 30),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치료에 들어가서 치유되고, 오히려 그들의 신경증은 개선된다” (p. 39). “정신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감각에 도달할 것이다(Lose more and more of your mind and come to your senses)” (p. 50) - 이런 구절들은 1960년대에 Perls의 홀마크(품질보증마크-번역자)가 되었다. 이런 기억하기 쉬운 구절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반복하여 말하기가 쉬워서 게슈탈트 치료의 대중화에 도움을 주었다 ; 하지만 그 구절들은 사람들이 게슈탈트 치료를 하찮게 보거나 잘못 이해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자유롭고 편안한 시기에 사람들은 한 개 내지 두 개의 워크샵에 참석하고, 슬로건을 배우고, 몇 개의 기술들을 얻은 다음, 이론적인 방향이 매우 적거나 혹은 아예 없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임상적인 경험도 없는 상태로 그들 자신 스스로를 게슈탈트 치료사라고 불렀다. 1969년 Perls는 가르치는데 있어 그의 슬로건 스타일이 게슈탈트 치료에 위험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게슈탈트의 축어적 보고에 공개적으로 개탄하는 서문을 달고, 일시적인 치료와 눈길을 끌기 위한 기법을 제공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코위찬 Cowichan, 1969
5년후 Esalen에서 Perls는 다시 한번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썩거리게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Richard Nix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에 대한 그의 정치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미국은 파시스트가 되었다 ; 어느 정도 그는 Esalen에 대한 실망이 생겨났으며, 다른 기법과 Schutz와 같은 리더들과 그의 작업을 경쟁하는 것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결국, Perls는 성장 과정의 다음 단계는 사람들이 그들의 성장을 통합시킬 수 있는 공동체(community)의 생활 형태라고 믿었다.
Perls는 캐나다 밴쿠버 섬의 Cowichan 호수에 오래된 모텔을 구입하여 이사하고, 1969년 게슈탈트 커뮤니티를 시작하였다. Perls는 Cowichan에서 거주하면서 훈련하는 워크샵을 처음으로 혼자, 그리고 Teddy Lyon, Barry Stevens, Janet Lederman에게 지원받으며 운영하였다. 그해 여름 Perls는 Cowichan에서 훈련을 위한 또 다른 스타일이나 체계를 실험하였다. 그는 그룹을 실제로 이끄는 것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의 새로운 관심을 따라가고 그가 원할 때면 개입을 하면서 그룹과 그룹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것이 그가 항상 어떤 것들을 행하고 변화시켰던 방법이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그가 보는 즉시, 그는 상황을 바꾸면서 담요를 잡아당겼다 ;... 게슈탈트라 할 수 있는 관찰과 알아차림 대신에 패턴(타성(rut)의 또 다른 이름) 속으로 들어가고, 그 패턴에 따라 사는 것은 쉽다. (Barry Stevens in Gaines, 1979: 360)
Cowichan은 Perls의 집이 되었고, 그가 거기에서 창조해낸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열성적인 팬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옛 친구들이 방문하는 것을 매우 환영하며 좋아하였다: “Fritz가 캐나다로 간 그해 여름에 우리는 며칠 동안 그를 방문했다. 그는 집 밖으로 걸어 나와 마치 왕처럼 잔디밭에 앉았다. 행복했다. 그는 정말 행복하였다” (Ilana Rubenfeld in Gaines, 1979: 369). Cowichan에서 Perls는 참으로, 그의 인생에 어떤 때보다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Barry Stevens에게 털어 놓기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는 평화롭다네. 세상과 싸우지 않으면서 말이야.” (Gaines, 1979: 369). 또한 그의 일에도 만족해하며: “나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네. 나는 이보다 더 잘 할 수는 없다네.’. 결국, 그는 가족을 만들어 냈다고 느꼈으며, 그의 주변에 있는 명석한 치료사와 훈련가들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였다.
쓰레기통의 안과 밖(In and Out the Garbage Pail)
1968년 아직 Esalen에 있을 때에, Perls는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했었는데, 자서전은 쓰레기통의 안과 밖을 드나들다(In and Out the Garbage Pail) 라는 제목으로 1969년 12월 출간되었다 (Perls, 1969c). 이 책은 반추(reflections), 추억, 이론적인 설명, 시와 토론을 혼합(melange)한 것이었으며 이 모든 것이 생생하고, 굉장히 즉흥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쓰여졌다. 그것은 전개되고 있는 순간(unfolding moment)에 대한 Perls의 현재(current)의 강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자서전은 덜 체계적이고 아쉽게도 (실질적인 관점에서) 원본은 색인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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