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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 프로이드 인물탐구 : 양가감정과 양면적 인간관계
  • 작성자 : 비움심리상담
  • 작성일 : 2017-09-14
  • 조회 : 4293

프로이드 인물탐구 : 양가감정과 양면적 인간관계 

 

출처:  뉴스한국 5월호> 이창재

 


프로이드는 맑스, 니체와 더불어 현대사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거론된다. 맑스의 물결은 지난 50년간 전 세계에 거대한 ‘흔적’을 남기고 지금은 잠잠한 상태다. 그 여파로 이제 소위 지성인들의 관심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로 이동 중에 있다. 이미 1960년대부터 문예비평, 문화비평, 철학, 교육 등등에서 서양문화의 중심 이슈로 등장하다가 이제야 우리에게 밀려들고 있는 ‘정신분석’의 파도는 우리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를 제대로 진단하려면 먼저 ‘정신분석’에 대한 여러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프로이드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져보자. “무의식”ㆍ“유아성욕”ㆍ“죽음욕동”, "꿈-작품-증상" 해석으로 여전히 인류 정신에 묘한 충격을 주고 있는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리가 그에게 배울 바는 무엇인가? 

프로이드의 삶은 평탄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태어날 당시부터 복잡했던 가족관계, 가난, 유대인으로서 청년기 이후에 겪은 사회적 냉대, 15년간에 걸친 의사 집단으로부터의 따돌림, 가까웠던 정신분석학회 동료들과의 결별, 정신분석 치료의 실패에 따른 위기감 등은 그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16년간 서른세 차례에 걸쳐 받은 구강암 수술은 그에게 혹독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런 곤경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류 정신사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프로이드는 다수의 인간들에게 호감을 주는 호방한 인격자가 아니었다. 민감하고 섬세한 성격을 지녔던 그는 자신의 이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들과 고집스런 대립 태도로 인해 가까운 동료들과도 고통스런 결별을 했다. 심한 변덕, 히스테리 발작, 기차 여행 공포증, 모성성에 대한 갈증과 여성 관계에 있어서의 미숙함, 담배 중독,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이상적 아버지상에 대한 갈망, 가까운 사람에 대한 복잡한 애증 등은 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한 신경증적 특성이다. 그러나 이런 성격적 결핍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거나 그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자신과 인간 일반의 정신내면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하는 비상한 능력을 보인다. 20세기 정신사에 큰 충격을 준 정신분석학은 바로 창피하고 고통스런 자기 문제의 원인들에 대한 집요한 ‘‘자기 분석’ 활동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다. 

프로이드는 의사로서의 환자 치료보다, 정신의 알려지지 않은 특성들을 탐구하여 ‘인간’을 둘러싼 제반 수수께끼를 푸는 데 관심을 가졌다. 경제적 이익보다는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망과, ‘인류를 놀라게 할 대단한 무엇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야심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인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보통사람들은 결코 접촉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무의식’과 신경증 증상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그토록 집요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가? 

프로이드는 1856년에 동유럽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피 장사를 했던 부친은 40세, 모친은 20세로 둘 다 ‘유대인’이었다. 부친에겐 세상을 떠난 전처가 낳은 아들이 둘 있었다. 배다른 큰형의 나이는 프로이드의 엄마보다 많았고, 작은형은 엄마와 동갑이었다. 어린 시절 거실에서 놀 때면 그는 종종 아버지가 할아버지처럼 여겨졌고, 이복 둘째형이 엄마와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때부터 그는 인간들 사이의 묘하고 복잡한 관계에 대해 강한 의문과 호기심을 품게 된다. 
어린 시절엔 엄마가 (여)동생을 낳기 위해 며칠간 집을 비웠을 때 강한 불안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자신에게 쏠려 있던 집안의 관심이 동생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느끼고는 새로 생겨난 동생에게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곤 했다. 
빈에 이사와서도 동생들은 잇따라 태어났고, 그때마다 엄마는 얼마 동안 사라지곤 했다. 그는 집안의 관심이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식구에게로 분산되는 것을 보고, 엄마에게 계속 아기를 낳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참담한 불안을 자주 느끼곤 했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강렬한 소유욕과 자신을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증오 사이의 갈등은 어린 프로이드의 정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리고 이 불안과 갈등을 억압함으로써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여성에게 강한 애착과 분노를 함께 느끼는 양가감정에 오랜 기간 휘둘리게 된다. 

부친의 수입이 넉넉지 못했기에 그는 어릴 적부터 물질적 결핍을 느껴야 했다. 열악한 현실 속에서 별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던 그의 부모는 김나지움(중․고등학교) 시절 8년 중 6년간 수석을 차지한 프로이드를 자랑스러워하며, 인생의 모든 희망을 그에게 걸고 살았다. 그 증표의 하나로, 프로이드가 상급 김나지움에 입학한 후부터는 집에 있던 두 개의 방 중 하나를 그만의 공부방으로 제공하는 특별대우를 해 주었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높은 기대는 훗날 그의 정서에 양가적 영향을 미친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비난에 꺾이지 않고 자기 관점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유지하는 근원이 된다. 다른 한편으론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뭔가 특별한 힘을 보여야만 한다”는 강박적 초조감을 지니게 되었다.
대학 교양학부 시절에는 독서 서클에 가입해 철학, 정치학, 문학 등 인문․사회 과학 분야의 서적을 접했다. 괴테, 셰익스피어, 졸라, 세르반테스 등의 문학 작품을 탐독했고, 브렌타노의 심리 철학 수업들을 수강했다. 법학에도 관심이 많아 법률가가 될 것인지 철학자나 의사가 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던 중 우연히 괴테의 「자연론」에 관한 유명 학자의 강연을 듣게 된다. 그때 (엄마를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한) ‘자연’에 대해 강한 탐구욕을 느껴, 의학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여러 의학 과목 중에서 유독 관심을 끈 것은 정신병리학이었다. 그래서 브뤼케 교수의 생리학 실험실에 연구원으로 지원해 동물의 ‘뇌’ 척추신경이 신체 운동에 미치는 영향들을 연구하면서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특히 (유년기의 관음증 성향을 내포하는) 현미경으로 신경조직을 자세히 관찰하는 작업에 만족한다. 그러던 중 훗날 아내가 될 여인 마르타를 만나게 되자,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구로 인해 고민한다. 결국 ‘경제적 이유로’ 행복했던 연구원 생활을 포기하고는 의사의 길로 방향을 돌린다.
정신병리학 분야의 수련의사 과정에 지원한 그는 이내 정신질환의 발생 원인을 설명하는 당대의 의학적 관점에 어떤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신경생리학에 치중한 의학의 관점을 뛰어넘어, 심리학의 관점에서 정신질환의 문제를 해석해 보고픈 의욕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장학금으로 유학한 프랑스에서,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지적 자극을 준 샤르코를 만나게 된다. 

샤르코의 히스테리 최면 실험을 목격한 그는 강렬한 심리적 충족과 충격을 맛본다. 그 순간부터 히스테리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의학 관점에서 벗어나 심리학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런데 귀국 강연에서 히스테리가 ‘심리적 원인’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다가 빈 대학 의학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빈 종합병원은 그의 신경병리학 강사 자격을 박탈했으며, 뇌해부학 실험실 사용조차 금하기에 이른다. 그후 1902년 빈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까지 무려 15년 동안 사회적 ․ 학문적으로 심각한 고립 상태에 처한다.

고립된 그에게 정신적 위로를 준 사람은 스위스의 이비인후과 의사 플리스였다. 플리스는 당시 프로이드의 유일한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였다. 자신의 정신분석 관점에 대해 이해와 조언과 격려를 해 주던 플리스와 14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1887~1902) 속에서, 그는 사적인 고민을 포함해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한 솔직하고 철저한 ‘자기 분석’을 전개한다. 이런 오랜 친밀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사람은 다투고 결별한다. 

프로이드가 ‘정신분석’을 정립하는데 도움 준 다른 인물은 14년 연상의 유대인 내과의사 브로이어였다. 그와 히스테리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물인 ꡔ히스테리 연구ꡕ를 1895년에 발간한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되기 직전에 프로이드는 여러 히스테리 사례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신경증이 단순한 정서적 흥분 때문이 아니라, ‘성적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임을 발견한다. 프로이드가 신경증의 ‘성(性) 원인론’을 주장하자, 브로이어는 그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아울러 프로이드는 세인들로부터 의사와 환자 모두의 체면을 손상시킨 비도덕적인 인물로 비난받고, 찾아오는 환자 수도 줄어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1896년 팔순 노인인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자신의 뿌리가 뽑혀 나간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나흘간 반복된 자신의 꿈을 집요하게 분석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보편적인 입구와 획기적인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4년간에 걸친 ‘자기 분석’과 꿈해석의 결과인 ꡔ꿈의 해석ꡕ을 1900년에 발간한다. 이 책 7장에는 정신분석 이론의 토대를 이루는 ‘무의식’, 지형학적 정신 모델, 1차 과정과 2차 과정, 소망, 억압, 유아 성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이 언급된다.

프로이드는 ꡔ꿈의 해석ꡕ으로 자신이 이룩한 인간 정신에 관한 획기적인 탐구 업적이 인류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며, 학자들도 자신을 주시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당대 의사 집단은 이 책에 대해 또다시 무시와 비난 반응을 보였다. 이 당시 자신이 받은 수모와 냉대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한 그는 암 수술을 앞두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쓴 자서전 ꡔ나의 이력서ꡕ에서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의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신경생리학에 기초한의학과 정신분석학은 매우 다른 것이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다. 

1902년 오랜 기간의 사회적 고립과 환자가 끊김으로 인한 경제적 빈곤에 지친 그는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벌여, 마침내 빈 대학 의학부의 교수 자리를 얻게 된다. 이후 그의 정신분석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무시와 냉대는 급격히 해소되고 환자의 증가로 인해 생활의 여유도 생기게 된다. 그해 10월에는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정신분석 연구모임을 결성한다. 그리고 1906년에는 스위스 정신병원 의사 융이 방문하여 그의 이론에 동조를 표한다. 그 후부터 그의 정신분석 이론은 유럽 전역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08년에 ‘세계 정신분석학회’가 설립되고 난 후부터, 정신분석 관점과 이론은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되기 위한 시대적 주목을 받게 된다. 프로이드의 고립 생활은 청산되었고, 그는 국제적인 유명 인사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무의식적 정신작용들과 억압된 유아 성욕, 성욕동 발달 장애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에 영향 받아 생겨나는 것임을 ‘학문’으로 정착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들러와 융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프로이드는 외국인이며 비유대인인 융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정신분석의 타당성을 검증해 줄 가장 탁월한 인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이 아닌 융을 세계 정신분석학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고는 융이 자신을 대변하는 후계자가 되어 정신분석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최신 학문으로 정착시켜 주길 바랐다. 그런데 이 열망은 뜻밖의 실망과 상처로 돌아온다. 융은 유아 성욕과 ‘유년기 체험’의 중요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강조가 지나치다고 보았으며, 성욕동의 ‘과잉충족/과잉좌절’을 신경증의 근본 원인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했다. 융은 ‘리비도’를 성욕동이 아닌 생명 에너지로 해석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정신분석’을 독립된 학문 관점으로 정립하는 운동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아들러, 융, 랑크, 페렌체는 그로부터 차례로 독립해 떠나간다. 

플리스, 브로이어를 비롯해 그토록 가깝던 동료와 묘하게 다투어 결별하는 현상이 그에게 ‘반복’되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프로이드는 60세가 넘어서야 가까웠지만 경쟁관계였던 자신보다 ‘한 살 위 조카’와의 ‘어린시절 관계’가 이후의 인간관계 패턴에서 반복되었음을 ‘자기분석’해낸다. ‘무의식’의 학문인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드에게조차, 억압된 유년기 무의식은 강력한 ‘반복강박’의 위력을 생생히 드러냈던 것이다.

노년의 프로이드는 ꡔ쾌락원칙을 넘어서ꡕ에서 이례적으로 과학적 검증영역을 벗어나는 ‘죽음 본능’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관점만으로는 복잡한 인간 현실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사회학, 인류학, 교육학, 예술, 문학, 철학 등의 다양한 인접 학문들에 정신분석 지식이 결합되어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정신분석학의 거대한 힘은 인문․사회과학 이론과 접맥될 때 비로소 드러날 것이라는 그의 예견은,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인문사회학을 비롯한 다양한 제 학문 분야와 문화 전반에 걸쳐 검증되고 있다. 

1923년 구강암이 발병한 후 프로이드는 서른세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으며 신체와 정신 양면으로 고통을 겪는다. 매일 음식 섭취에 불편을 겪었으며, 수시로 엄습하는 격렬한 통증을 견뎌야 했다. 죽음의 불안과 유혹에 시달리는 상황을 그는 무려 16년 동안이나 버텼다. 인생의 위기 상황을 자기계발을 위한 자극제로 역이용할 줄 아는 독특한 능력과, ‘정신분석’을 인류 문화에 공헌하는 독보적인 학문으로 정립시키고 말겠다는 집념이 없었다면, 그의 ‘삶 본능’은 일찌감치 ‘죽음 본능’에 함몰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정신에 대한 연구와 정신분석 활동을 여든넷에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 계속하였다. 

프로이드 사망 후 67년이 지난 오늘날엔 6~7개의 정신분석 학파들이 각자의 진리성을 주장하면서 존립한다. 그들 각각은 프로이드 이론을 계승하고 보완, 비판하는 차원에서 발생된 것이기에, 현대정신분석에 대한 ‘전체 조망’을 얻으려면 여전히 프로이드를 ‘통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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