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슈탈트 포럼)
게슈탈트치료의 일차적인 목표는 외부로 투사되거나 자신의 내부에서 격리되어 자신의 것으로 자각되고 통합되지 못한 에너지 혹은 감정들을 자각, 의식하고 나아가 이들을 통합하는데 있다. 그것은 이러한 내적에너지를 통합하지 못하는 이를 외부에 투사하거나 억압해 버림으로서 자신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적으로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슈탈트치료의 이차적인 목표 혹은 최종목표는 개체로 하여금 실존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게슈탈트치료에서 추구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내적 에너지의 통합은 개체로 하여금 더이상 외부에 의존하지않고 스스로 자립할(self-support) 수 있도록 하고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정형화된 행동을 하는 대신 실존적으로 깨어있어, 자신의 존재는 물론 타인의 존재와 사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로 바라보게 해주어 삶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창조적으로 살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자신의 내적 자원을 신뢰할 수 있으므로 더이상 외부환경에 의존하려 하지않고 스스로 정한 방향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이때 개체는 유기체의 순수한 자연적인 욕구에 따라 삶으로서 더이상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자신과 하나가 되어 살게 되며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도덕주의(shouldism : Perls)와 분석주의(aboutism : Perls)에 희생된 삶은 자신의 유기체적 욕구와 삶의 실존성을 무시하고 개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도덕적 당위와 환경의 요구에 의해서만 살도록 강요한다. 개체의 실존속으로 들어가서 실존적 의미를 이해하고, 또 실존적 한계와 요구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항상 개체를 대상화시키고(Gegesrandisierung), 개념화시키며 분석하려들어 개체를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삶은 유기체로 하여금 삶에 만족과 긍정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분노와 자기질책을 초래하고 염세주의와 비관주의로 흐르게 한다.
염세주의와 비관주의는 삶의 모든 국면이 "문제"들로만 보이게 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생각과 계획들이 생산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문제들을 낳을 뿐 근원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러한 문제들의 대부분이 그것들을 "문제"로 보려는 염세주의적, 비관주의적 태도에 의해 발생한 "가짜문제(pseudo-problem)"들이기 때문이다.
실존적 삶에서는 유기체의 자연스런 욕구에 따라 살며 이때 인위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 여러 개의 욕구가 동시에 존재할 때 유기체는 이를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 따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이를 상황에 맡기므로 모든 것이 자연에 의해 조절된다. 때로는 고통을 감수해야할 상황이 발생하지만 유기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이겨나갈 힘이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게 된다.
성숙한 개체는 현재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결국 통합되고 치유되어 그 순간의 고통으로 끝난다. 그래서 개체는 미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온 에너지를 미래를 계획하고 안전장치를 만드는데 소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 이자리의 삶에 충실하고 이때 이자리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실존적 자세로 산다.
개체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서 이를 극복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을 하거나 혹은 자신에 대해 과도하게 긍정적인 개념을 설정해 놓고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진정한 삶은 "남보다 나은"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되는(werden) 것이다. 즉 자신의 진정한 실존적 가능성을 매순간마다 실현시키는 것이다.
비실존적인 삶이 자신은 어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개념(a concept what one should be like)에 집착하는데 반해서 실존적인 삶은 자기자신을 실현시키는데 목표를 둔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이상이나 도덕적 기준에 자신을 얽매려는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않는다. 자신의 실존적 욕구에 위배되는 삶은 거짓 삶(pseudo-existence)이며 자신을 소외시키고 현실을 떠난 폐쇄적이고 공상적인 삶에 지나지않는다.
그러한 삶은 어떤 당위나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고 판단하며, 따라서 살아 숨쉬며 감정을 느끼는 존재(Sein) 보다는 생명없는 개념으로 표백된 이상(Ideal)이나 사회적, 도덕적 기준 혹은 타인의 가치판단을 더 중시한다. 게슈탈트치료는 개체가 이러한 비실존적인 삶으로 빠지는 것을 경고하는 한편, 개체가 자신의 존재의 본연으로 돌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에게 자신의 존재를 실현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비현실적인 삶은 허구적인 목표를 설정하고서 끊임없이 개체로 하여금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채찍질하고 항상 도달하지 못한 부분만큼에 대해 질책하는 비관적인 삶이며, 행동의 목표는 미래의 당위에 있으므로 현재는 영원히 부정적인 상태로 지각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개체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즉 현재란 고쳐져야할 그 무엇으로서 과도기적 지위 밖에 얻지못한다. 미래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당위가 실현되어야할 이론적인 시점(Zeitpunkt)으로 상정될 뿐 실제로 유기체가 자신을 실현시키는 시간과 장소로서 열려있는 미래는 거부된다.
반면에 실존적인 삶은 미래의 당위가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이 중심이 된다. 현재 살아숨쉬고 움직이는 나와 너, 너와 세계의 실존적 상황에서의 참 만남이 있을 뿐이다. "어떠 어떠해야 한다(sollen)"가 아니라 "어떠 어떠하게 있다(ist)"가 관심의 대상이다. 내가 가져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체험하고 있는 그 무엇들이 나의 의식의 내용을 이룬다. 현재는 내가 존재하는 실존적 장이며 미래는 나의 존재가 실현되는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모든 존재는 되어야할 당위에 의해 판단되지 않고 지금 있는(ist) 그 모습대로 받아들여진다.
항상 없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비실존적 삶에 반해 실존적인 삶은 있는 것에 대해 눈을 돌린다. 현상학적으로 존재는 "있는 것"이 그 속성인데, 비실존적인 삶은 "없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므로 말미암아 존재를 외면하게 되고 삶을 왜곡하고 소외시킨다. 이러한 삶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되어 마침내 삶과 현실을 기피하고 우리의 존재를 병들게 만든다.
반면에 실존적인 삶은 항상 "있음(ist)"에 초점을 맞추어 긍정적인 시각을 키우고 삶과 현실에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이때 개체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며 삶을 풍성하게 산다. 현재는 감사와 만족으로 체험되고 미래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기다려진다. 나의 존재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에너지로 충만하고, 감사와 설레임으로 기다려진다. 나의 존재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에너지로 충만하고 감사와 기쁨에 가득하고 타인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가 신비로 느껴지며, 유일하고 고귀한 존재로 나에게 다가와서 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제 더이상 대상(Gegenstand)으로서의 나와 너 구분이 없어지고 실존적인 존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밝은 빛으로서 세계를 비추어 나가며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 또한 체험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개체는 자신의 존재를 세계속에서 실현시키고 좁은 의미의 자아를 극복하고, 세계속의 존재(in-der-Welt Sein)로서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이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실존적인 존재가 될 때 건강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게슈탈트치료의 목표는 실존적인 삶에 있다고 한 바, 내적으로는 개체가 자신의 유기체적 욕구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여, 모든 자신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에너지를 통합하여, 스스로 자립하면서 자신의 모든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가고, 외적으로는 타인을 대하여 타인을 나의 투사로가 아니라 타인의 모습 그대로 보고,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나의 채색된 개념이나 투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실존적 상황에열려있는 자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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